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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에 빠진 뇌,중독·강박장애 겪을 때와 비슷

로맨스의 과학



"중앙선데이, 오피니언 리더의 신문"

우리 사회에서 ‘로맨틱하다’라는 말과 달리 ‘로맨스’에는 부정적 뉘앙스가 담겨 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표현 탓도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로맨스는 불륜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다. 더도 덜도 말고 ‘사랑’, 연인들의 낭만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뜻한다. 로맨스에 빠진 연인들이 서로의 육체를 갈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렇다고 성욕이 곧 로맨스는 아니다. 성욕은 인류가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며 현재까지 번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진화심리학을 비롯한 최근 학계의 연구는 성욕뿐만 아니라 로맨스 역시 인류 번창에 기여한 진화의 산물이자, 인간의 본능이라고 본다.

이는 미국 인류학자 헬렌 피셔의 주장이기도 하다. 사랑에 대한 학문적 연구로 이름난 피셔는 사랑을 정욕(lust), 애정(attraction), 애착(attachment)으로 구분한다. 2004년 펴낸 '우리는 왜 사랑에 빠지는가'(Why We Love, 국내 개정번역판 제목은 '연애본능'에서 피셔는 이 셋 모두 오랜 인류 진화의 산물이자, 짝짓기와 생식작용을 지휘하는 뇌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피셔에 따르면 인류의 진화과정에서 ‘정욕’은 인간이 상대를 크게 가리지 않고 성적 결합을 추구하도록 자극했다. 반면 낭만적 사랑으로도 불리는 ‘애정’은 한 번에 한 사람에게 구애를 집중시키게 하는 역할을 했다. 낭만적 사랑에 빠진 우리 조상들은 특정 상대와 성적으로 충실한 관계를 일정 기간 지속적으로 맺었다. 덕분에 생식에 성공하고 짝짓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열정을 절약할 수 있었다. 피셔가 말하는 ‘애착’은 한국식으로 옮기면 오래된 부부관계의 ‘정(情)’과 비슷한 의미다. 서로 차분함과 평온함을 느끼게 하는 애착은, 함께 낳은 아이들을 기르는 데 필요한 기간 동안 상대에 대한 사랑이 유지되게 했다.

한창때 불타 오르던 열정적 사랑이 시간이 지나면서 퇴조하는 것은 각각의 연인들에게는 아쉬운 일일지 몰라도, 피셔의 설명을 들어보면 인류라는 종의 생존에는 필수적이다. 사랑의 열병을 앓아본 이들은 쉽게 깨닫는 일이지만, 사랑은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한다. 한창 로맨스에 빠진 연인들은 온종일 상대를 생각하며 밤잠을 못 이루거나, 입맛을 잃기도 한다. 이런 상태는 일상의 평화를 유지하거나 아이를 키우는 일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인간은 갓난아기에서 성인으로 자라는 기간이 여느 동물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길다. 피셔는 낭만적 사랑이 식는 것 역시 “의심할 여지 없이 진화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성장기간이 길어진 이유를 인류학자들은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여느 포유류와 비교할 수 없이 큰 뇌를 갖게 된 데서 찾는다. 머리가 커진 아이들을 좁은 산도(産道)로 출산하면서 여성들은 목숨을 잃곤 했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뇌가 덜 자라 머리가 작은 아이를 낳는 여성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컸을 것이다. 점차 인간의 아이는 다른 동물에 비해 유달리 덜 발달된 상태에서 태어나는 대신 성장기가 길어지게 됐다. 여자는 이 긴 시간 동안 양육을 함께 할 파트너가 절실해졌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오랜 배우자 관계를 유지하게 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이 같은 설명에 대해 서울대 장대익(자유전공학부) 교수는 “낭만적인 사랑을 근대 이후의 산물이라고 보는 시각과 반대”라고 지적했다. 상당수 역사학자·사회학자들이 낭만적 사랑은 개인의 개성이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등장한 것이라고 설명하곤 한다. 이 시각에 따르면 사랑이 짝짓기의 전제조건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예컨대 서구 중세 귀족들에게 결혼은 가문과 재산을 유지하기 위한 정략적 제도였다. 결혼과 연애와 성욕은 별개의 문제였다. 연애는 일종의 유희였고, 장기간 열정을 쏟아부을 만한 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심지어 고대 로마에서는 열정적 사랑에 빠진 사람을 치료가 필요한 환자로 취급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러나 인류학이나 진화심리학이 연구 대상으로 삼는 역사시대는 사회학·역사학보다 한참 더 거슬러 올라간다. 인류가 직립보행을 시작하던 무렵부터 이미 낭만적 사랑은 인간이라는 종이 이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것이다. 장대익 교수는 “로맨스 같은 주제는 과거엔 과학연구의 대상이 아니었지만 최근엔 신경전달물질 등 신경과학적 연구와 진화심리학적 연구가 봇물처럼 쏟아진다”고 말했다.

인간의 행동과 심리를 진화론을 통해 설명하는 진화심리학은 1970년대 이후 대두한 새로운 학문분야다. 진화심리학은 짝짓기에 대한 다양한 통설에 흥미로운 근거를 제공해주곤 한다. 예컨대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이 ‘여자는 외모, 남자는 능력’이라는 대표적인 통설에도 일리가 있다. 우선 남자가 여자의 외모에 초점을 맞추게 된 이유를 보자. 허리와 엉덩이의 적당한 비율처럼 생식에 적합한 외모의 여성을 선택한 남자 조상일수록 생식 성공 가능성이 커져 지금까지 더 많은 후손을 남겼으리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반면 여성은 사회적 지위, 경제력을 비롯해 자녀양육에 도움이 되는 남자의 능력을 추가로 염두에 두어야 했을 것이다. 이 설명대로라면 상대에게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는 일은 여성보다 남성에게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여성은 생식에 유리한 외모만이 아니라 양육에 도움 되는 남성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짝을 고르는 데 남성보다 시간을 더 들일 수밖에 없다.

진화심리학은 남자의 바람기에 대해서도 설명한다. 우리 조상 가운데 기존의 파트너 이외에 새로운 상대와도 짝짓기를 한 남성들이 더 많은 자녀를 퍼뜨렸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은 자칫 남성의 외도, 또여성의 외모와 남성의 경제력을 기준으로 배우자를 찾는 풍토를 합리화하는 근거로 오용되기도 한다. 진화심리학자인 경희대 전중환(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이에 대해 “우리는 유전자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전 교수는 “우리가 과거 조상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었을 유전자를 지니고 있지만 유전자가 우리 팔목을 비틀거나 등을 떠미는 것은 아니다”라며 “현대인에게는 바람을 피우고 싶은 본능도, (바람을 피워)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거나 따돌림을 당하고 싶지 않은 본능도 있다”고 말했다. 

낭만적 사랑에 빠지면 세로토닌 수치 낮아져 상대에 집착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뇌는 다르다. fMRI(func 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 기능성 자기공명영상장치)를 통해 뇌의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촬영하면 확인할 수 있다. 헬렌 피셔도 이런 실험을 했다. 열정적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무의미한 정보와 연인의 사진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연인의 사진을 보았을 때 뇌의 특정 부위가 활성화되어 반짝이는 모습이 포착됐다. 뇌에서 분비되는 신경전달물질은 뇌가 정욕·애정·애착 중에서 어떤 상태이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정욕의 강도는 남녀 모두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높을수록 높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낭만적 사랑은 도파민·노르에피네프린의 높은 수치, 세로토닌의 낮은 수치와 관련 있다. 도파민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약물·도박 등에 중독된 사람들의 뇌에서도 수치가 높게 나타난다. 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들 역시 일종의 중독상태인 셈이다. 노르에피네프린은 수치가 높아지면 과도한 흥분·불면증·식욕상실 등을 낳는다. 사랑에 빠진 이들이 밤잠을 설치거나 입맛을 잃는 것이 무리가 아니다. 반면 낭만적 사랑에 빠진 사람들의 세로토닌의 수치는 낮게 나타났다. 강박장애환자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한창 사랑에 빠진 이들이 상대방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이유를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애착은 옥시토신·바소프레신과 관련이 있다. 수컷 들쥐에게 바소프레신을 주사하면 영역 확보에 힘쓰고 암컷에 대한 소유욕을 보인 반면 바소프레신을 차단하면 교미 후 곧 암컷을 버리고 다른 암컷을 찾는 모습을 보인다.

각각의 신경전달물질은 정욕·애정·애착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바소프레신·옥시토신은 성관계에서 희열을 느끼는 순간 각각 남성·여성에게 급격히 증가하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성관계 이후 애착의 감정이 강화된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다. 도파민은 수치가 높아지면 테스토스테론의 방출을 자극한다. 낭만적 사랑이 정욕으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그러나 뇌의 화학물질들이 벌이는 사랑의 방정식은 단순하지 않다. 테스토스테론은 바소프레신·옥시토신의 수치를 높이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낮추기도 한다. 정욕이 애착을, 애착이 정욕을 서로 낳을 수도 있지만 서로를 감소시키는 역할도 한다는 얘기다.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높은 남성은 대체로 결혼·이혼 모두 잦은 것으로 알려졌다. 복잡하기는 낭만적 사랑과 애착의 화학작용도 마찬가지다. 뇌 속의 화학물질은 사랑의 묘약 노릇을 할 수도 있지만, 실험실에서 이를 제조하기란 쉽지 않은 듯 보인다. 

이후남 기자 hoonam@joongang.co.kr

 

출처 :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1/11/20/6349771.html?cloc=nn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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